희롱을 다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마가복음 15:20~23
파송예배를 맡으면서 부담도 됐지만은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의 걸음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갈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삶의 유형을 3단계로 정의를 해봤다.
1단계 내가 원하는 대 살지 못하는 삶
2단계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는 삶
3단계 주님을 따라가는 삶
우리가 원하는 삶의 모습을 이룰 수 없는 이유는 생각하지 않거나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꿈이 있는 사람들은 꿈을 이루기 위해서 목표를 세우고 의지를 갖고 도전을 하는 사람들이다. 꿈이 없더라도 자기가 원하는 삶의 모습들이 있다. 재무, 건강, 관계 등에 어려움 없는 사람 되는 것이 어렵다.
3단계 주님을 따르는 삶도 참 쉽지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아직은 우리가 대부분이 1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2단계의 삶을 이루는 것도 어렵지만 그다음에는 정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네가 젊어서는 띠 띠고 네가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네가 늙어서는 남이 너에게 띠 띠우고 너를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영역이 있을 텐데 그 부르심을 발견해서 순종하면서 산다는 것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어려울 수가 있다.
사람들은 무엇을 많이 가져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도 그런 실수를 한다. 내가 재능, 물질, 인맥, 환경이 없어서 안 된다고 핑계한다. 우리는 기도할 때도 “주시옵소서”를 먼저 기도한다.
그러나 내가 먼저 하나님 앞에 그리고 다른 사람들 앞에 태도를 갖추면 그에 맞는 행동이 나오고 그 행동이 임계점에 다다라 열매 맺을 때 하나님이 맡기신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어떠한 말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항상 책임감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사람이 될 것이다.
책임감이라는 말 자체는 굉장히 딱딱하고 단어 자체가 주는 느낌이 꼭 유쾌하지 않을 수 있다. 뭔가 의무적이고 강제적이고 억지로 하는 것 같고, 유쾌하게 막 그렇게 부드럽게 다가오는 그런 단어는 아니다. 하지만 이것을 사랑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책임감은 사랑이고, 달란트이다.
책임감은 내가 키울 수 있다. 신앙, 삶, 감정의 영역에서 책임감을 매일 키우는 노력이 필요하다. 책임감이 있으면 시간과 물질을 막 사용하지 않고 책임 있게 사용한다.
우리 교회 분열 사태 전에도 우리 교회 떠난 이들이 떠나면서 “성락교회는 사랑이 없어“라는 말을 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도 교회의 문제, 나의 문제, 사람들의 문제를 직면하면 남 탓했다. 그런 문제는 팩트일 수 있다. 그러나 책임감 있는 사람은 그 상황에서 먼저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가 될 것이. 교회의 부족함이 보일 때 책임감 있는 성도로서 그 부족함을 채우는 사람이 된다. 책임감 있는 성도는 함부로 손가락질하지 않을 것이고, 말의 권세를 알기에 말을 함부로 하지 않을 것이다.
책임감은 내가 키울 수 있다. 책임감을 갖는 만큼 하나님께서 맡겨주신다는 것이다. 책임감이 있는 사람은 자기 시간과 물질에 대해서도 자기에 대한 책임감이 있다면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있다면 허투루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our daily bread)라고 하셨는데, 책임감을 키우면 일용할 양식이 달라진다. 일용할 양식은 나의 하루 밥 세 끼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나눠주는 빵까지 포함된다고 한다.
혼자 사는 사람의 일용할 양식과 5인 가족의 일용할 양식의 크기가 다르다. 맡고 있는 사람의 책임에 따라, 책임감의 양만큼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의 크기를 늘려주신다. 일용할 양식은 쌓아놓는 것 아니라 그날 그날 때를 따라 주시는 것이다. 책임감의 크기만큼 키워주신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성경에 잠시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지만 참 감동이 된다. 구레네 시몬은 예수를 알았을 수도 몰랐을 수도 있다. 길을 가는데 사형수가 십자가 못지니까 로마 군인이 잡아서 그에게 대신 지라고 한다. 구레네 시몬의 기분이 어땠을까? 황당했고 재수 없는 날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그가 십자가 질 때 어땠을까? 일단 힘들었을 것이다.
오늘 본문의 구레네 시몬이 로마서 말미에 등장한다 로마서 16장 13절의 루포는 구레네 시몬의 아들이다. 구레네 시몬은 예수를 알지 못했던 것 같고 길가다가 십자가가 로마병사의 무력에 반항 못해 한 것일 것이다. 그런 시몬을 주님이 기억하고 지켜봤다. 그는 주님의 죽음을 보고 그가 죄를 담당하신 분임을 알고 믿음을 가졌을 것이고 그의 가족과 자녀도 믿음 갖고 초대교회의 일꾼 됐다.
믿음이 있는 자에게는 그에 걸맞은 책임감이 반드시 따른다. 책임감 없는 믿음은 사랑도 달란트도 없는 믿음이다.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십자가 졌을 때 그는 숭고한 뜻이 없었을 것이다. 성경에도 ‘억지로 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예수가 어떤 분인지 깨닫고 자기가 진 십자가의 은혜 알고 난 뒤 예수님에 대한 교회에 대한 책임감 갖게 됐을 것이다.
책임감은 예수님의 모습이다. 우리 영혼을 망쳐 멸망하게 하는 것은 마귀이지만 그에 대한 책임은 예수님이 지셨다. 그래서 우리가 가는 길에서 우리가 책임감 짊어지는 것은 예수의 책임감 닮는 것이다.
히브리서 12장 2절을 보면 예수도 우리를 책임지기 위해 십자가의 부끄러움 개의치 않았다. 그가 그렇게 하심은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책임감을 갖고 내 삶과 교회, 영혼, 목장에 대해 책임감 지는 것은 소망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책임감 갖고 이뤄갈 때 주님이 상을 주기고 누리게 하시는 것이 약속돼 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삶도 살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 부르시고 택하신 사람 살기 위한 자세가 필요하다.
빌립보서 4장 10-12절을 보면 책임감을 갖고 책임감을 키워가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과 모든 것이 선을 이루는 역사가 있다. 그 모든 게 합쳐져 하나님이 선하다 일컫는 존재로 바꾸신다. ‘능력 주시는 자 안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을 가능케 한다’가 아니라 궁핍 고난, 핍박, 배고픔 등 육체의 눈으로 볼 때 비참한 상황에 처할 수 있는 것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를 하려면 내 삶에 대해서 주님의 교회에 대한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벧전 2:21 말씀처럼 여러분에게 주어진 책임감을 발견하고 키워갈 수 있도록 바꿔가기 원한다. 게임, 넷플릭스, 스마트폰 등에 중독되어 있던 내가 벗어나는 데 5년 걸렸다. 내 삶을 책임지고자 하는 질문하기 시작했고 벗어나기 시작했다.
고난은 그리스도가 받았기에 당장 우리에게 고난 주지 않으신다. 그러나 고난받은 주님을 따라가면 평탄치 않고 고난이 있을 수 있다. 비천 풍부에 처할 줄 알아 주님 따라가면 1단계 삶 나아가 2• 3단계 삶에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변화시켜주시길 기도하자. 수련회 전과 후가 달라야 한다. 내 삶과 모임과 교회를 위해 책임지고 손해를 감당하는 사람 될 수 있도록 기도하자.